
실제로 지난 수십년 동안은 이런 시장경제 원칙들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지켜진 시대였다. 1980년대 말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으로 시장경제의 우수성이 역사적으로 입증됐으며, 이데올로기 장벽이 무너지면서 중국을 포함한 수많은 국가들이 새롭게 세계시장에 편입되면서 자유무역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미국은 이런 세계 경제질서를 주도하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국내적으로 시장경제를 가장 충실하게 실현했고, 대외적으로 자국의 시장을 활짝 개방해 전 세계적 자유무역을 선도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국가에 경제성장 기회를 제공한 것은 물론이고, 미국 자신도 누구 못지않은 큰 혜택을 누렸다. 해외에서 낮은 비용으로 생산된 재화들이 대거 수입되면서 소비자는 전례 없이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세계 금융과 디지털 혁명의 중심지로서 엄청난 수익과 고소득 일자리를 창출했다. 금융위기를 겪고도 월스트리트는 여전히 건재하고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등 21세기 기술 공룡기업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성장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유럽, 일본 등의 다른 전통적 선진국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전 세계 경제와 정치를 호령하는 초강대국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인들은 이런 기존 질서를 통째로 뒤엎으려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걸까. 혹자는 트럼프가 가짜 뉴스와 선동을 통해 미국 유권자를 현혹한 결과라고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그것도 중간에 정권을 내어주고 수년간 혹독한 검증을 거친 이후에도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것은 트럼프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가 허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즉 미국에는 기존 질서에 반감을 가진 유권자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식과 기술 중심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주로 전통적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자유무역으로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드는 반면 학력이 낮아 신산업으로 갈아탈 수도 없고, 그나마 국내에 남아있는 일자리도 이민자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미국에서 고졸자 비중이 절반 이상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결코 소수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젠 토토을 강조하는 기존 질서는 아무도 이들 편에 서지 않았다. 경제학은 막상 분배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고, 기성정치권 역시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신자유주의에 몰입된 보수진영은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당마저 누구나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가면 성공하는 사회는 공정하다는 프레임에 갇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이런 틀을 깨고 나와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었던 과거의 '위대한' 미국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기존 질서와 관행을 모두 뒤엎는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상호주의와 자유무역보다 자국 우선주의가 미국 대중에게 더 유리하고, 미국의 자유세계 리더십도 돈낭비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이런 정책들은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패자로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적어도 기존 질서에서 소외된 지지층을 결집하여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계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에 직면한 우리나라에도 젠 토토은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이다.그러나 젠 토토 추구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방치할 경우 어떤 역풍이 불 수 있는지 미국의 예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영산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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