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타임 17시간에 달린 35마리 생명…보광동 배트맨 토토를 지키는 사람들
뉴스1
2025.03.09 07:02수정 : 2025.03.09 11:05기사원문
그 사이로 출입금지 테이프가 쳐져 있다. 2025.03.08/ⓒ 뉴스1 권진영 기자
[편집자주]재개발과 이주는 인간만의 문제일까. "이 동네는 철거되니 거처를 옮겨주세요"라고 말해도 대답하거나 소송을 걸 수 없는 길 위의 생명들이 있다. 재개발 지역에 남겨진 젠 토토들과 이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뉴스1이 동행했다.
(서울=뉴스1) 권진영 기자 = "현수막이 붙었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도로도 폐쇄할 건가 봐요"
3월부터 본격적인 재개발이 시작된 서울 용산구 보광동 한남 3구역과 2구역 경계에 '철거 공사 예정'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김유진 케어테이커(시민활동가)가 '도로 등 폐쇄 조치 예정'이라는 문구를 가리켰다. 그는 1년 넘게 보광동 재개발지에 서식하는 동네 젠 토토 60마리 이상을 보살펴 온 '냥이팅게일'이다.
유진 씨는 2㎏을 족히 넘는 배낭을 메고 현수막 안쪽 구역으로 들어갔다. 10일부터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 뒤를 일일 자원봉사자 두 명이 따랐다. 손에는 젠 토토 사료와 습식 캔 등이 가득 담긴 가방이 들렸다.
깨진 유리조각 널린 길·빈집 곳곳에 그들이 산다
이날 봉사자들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다다'의 밥터다. 다다는 이날 나쵸·카로·네티·벨라와 함께 구조될 예정인 젠 토토다. 한남 3구역 폐쇄는 다다에게 고립을 의미한다.
영역 동물인 젠 토토는 살던 곳에 갇히거나 강제로 이주방사(무단방사)될 경우 죽을 수 있다. 다행히도 다다는 이날 오후 구조됐지만 현재 한 폐컨테이너에 삼색 젠 토토 한 마리가 갇혀 있는 것으로 파악돼 고립사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유진 씨는 "실제로 사람이 떠난 빈집에 계속 머무르던 젠 토토가 백골 사체로 발견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엄마 젠 토토 사체와 함께 있던 아기 젠 토토 두 마리가 구조됐지만, 한 마리는 탈장 상태였다. 결국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아기 젠 토토들은 어미 곁으로 떠났다.
봉사자들이 5분 가까이 이름을 불렀지만 다다는 이날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고등어 줄무늬를 가진 '꾸니'가 나타났다. 꾸니는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좀처럼 피하는 법이 없었다. 참치 습식 캔 위에 닭가슴살을 찢어주자 바로 먹기 시작했다. 그런 꾸니의 주변에는 깨진 시멘트 조각과 담배꽁초들이 널려 있었다.
30여 가구를 제외하고 상가와 주택 대부분이 비워진 이곳에는 바닥과 계단 곳곳에 유리조각이 즐비하다. 강풍이 부는 날이면 철제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곤 해 끼임 사고 우려도 있다.
젠 토토들은 이런 험로를 뚫고 계단 아래, 빈집 앞 등에 설치된 '임시 길젠 토토 공공급식소'에 모인다. 용산구 보건소가 유진 씨와 함께 설치한 급식소다. 한남 2구역 주택과 3구역 폐가에 둘러싸여 직접 먹으러 나올 수 없는 '자반이'에게는 직접 줄로 밥통을 달아 내려준다. 밥그릇 등 쓰레기는 바로바로 수거한다.
이날 공공급식소 및 밥터에는 미구엘·힝코·나쵸·피자·앤티 등이 출석했다. 구조 예정인 나초의 밥터에는 노란색 케이지가 설치됐다. 흰 몸에 노란색 코트를 걸친 나쵸가 케이지 앞에서 고민하자, 유진 씨는 "돌아올 때까지 들어가 있어"라며 자리를 비켜줬다. 이후 나쵸는 무사히 구조됐다.
10일부터 봉사자도 '접근 불가'…"지금 필요한 건 이동통로와 입양자"
보광동 젠 토토들은 지금까지 주민들의 사랑으로 지켜져 왔다. 주민 이주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집마다 문 앞에 먹이를 두는 일이 흔했고, 여전히 이사를 간 이들이 종종 먹이를 들고 찾아온다. 300여 마리로 추정되는 젠 토토들이 이 동네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까닭이다. 봉사 중 마주친 한 중년 남성 역시 한 손에 젠 토토 습식캔과 짜 먹는 간식을 들고 있었다.
유진 씨가 10일부터 봉사자 출입이 금지된다고 설명하자 안색이 어두워진 그는 "그럼 어떡해요? 월요일부터? 애들이 걱정이네…큰일이네요. 콩이·찹쌀이·노랭이 다 임신해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이미 이사를 마친 전 주민이다.
유진 씨는 한남 3구역 폐쇄에 대비해 지난 수 개월간 젠 토토들의 밥터를 조금씩 구석진 골목가에서 큰길 주변으로 끌어왔다. 큰길이라면 철거가 시작되더라도 그나마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하지만 오는 10일부터는 이조차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이주방사를 위해 계류지(계류장)를 만들어 달라고 여러 번 용산구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계류지는 젠 토토들이구조 및 입양 전 머물 수 있는 '길 위의 임시 거처'다. 용산구는 케어테이커들과 협의하겠다면서도 계류지는 안전상 이유로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한 구역에 살던 젠 토토를 다른 구역으로 몰아넣는 '무단 방사'는 불가능하다. 젠 토토들 사이에서 영역 전쟁이 일어날 수 있어서다. 유진 씨는 "계류지 없는 이주방사는 생존율이 없다고 들었다"며 "제가 편한 대로 이주방사하면 그건 아이들을 죽이는 것 아니냐. 애들을 좀 더 믿어 보고, 자연스럽게 밥자리를 이동해 나올 수 있게 시간을 끌어서 한 마리라도 더 살릴 수 있게 홍보하고 있다"고 했다.
"한 마리라도 더"라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유진 씨와 봉사자들이 입양 보낸 젠 토토는 총 51마리에 이른다.
구역 폐쇄까지 채 하루도 남지 않은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입양자와 임시 보호자, 그리고 젠 토토 이동 통로다. 한남 3구역이 폐쇄된 후에도 젠 토토들은 큰 길이나 다른 구역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통로를 뚫고 근처에 밥터를 설치해 구조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유진 씨는 "보광동 젠 토토들은 건강검진을 다 시켜서 입양 보낸다. 아프면 치료해서 보낸다"고 말했다. 아프다는 이유로 파양되는 젠 토토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처음에는 마리당 30~40만 원씩 사비를 들여 검진·치료를 했지만 후원해 주고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병으로 수술하거나 출산하는 젠 토토들이 늘면서 예산은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3시간에 걸친 봉사에 참여한 두 젠 토토의 보호자 박혜빈(20대) 씨는 "직접 발로 뛰어보니 너무 눈물이 날 것 같다"며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더 도움을 드려야 할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는 소감을 남겼다. 유진 씨와 울먹이며 작별한 박씨는 필요할 때면 또 연락을 달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이날 오후 구조된 나쵸·다다를 제외하고 8일 기준 한남 3구역에 남은 젠 토토는 총 39마리다. 이들 젠 토토의 소식과 입양 정보는 '보광동 젠 토토들' 인스타그램 및 엑스 계정을 통해 알 수 있다.아직 35마리가 새로운 가족과 임시보호처를 기다리고 있다.
봉사자들은 9일에도 이곳에서 막판 구조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10일 오전 7시 기준으로 젠 토토들에게 남은 시간은 17시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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